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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 재테크’ 하면 떠오르는 사람이 된 개그맨 김생민. 개그맨으로서 겪은 위기를 리포터로 활동하며 극복하고 자신의 입지를 다진 김생민이 말하는 인생 이야기.
“‘한방’대신 성실함으로 성공한 나의 15년 연예계 생활을 말한다”
‘출연료만 모아 재테크해서 10억을 벌었다’는 기사가 뜬 이후로 개그맨 김생민에게는 인터뷰 요청 전화가 줄을 서고 있다. 몇몇 출판사에서도 책을 내보자는 권유가 이어진다. 하지만 그는 면구스러워서 거절할 뿐이다. 책으로 재테크를 배운 그이기에 함부로 책을 써서 ‘혹세무민’할 수가 없다고. 개그맨이 개그로 유명해져야 하는데 재테크로 더 유명해진 게 아닌가 싶어 은근히 걱정도 된다.
재테크는 ‘극기’다
10억원을 번 연예인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광고 출연료가 10억원을 웃도는 스타들이 열 손가락을 채우지 않는가. 하지만 연예인들조차 김생민의 재테크를 궁금해하는 건, 그가‘한방’을 노리지 않고 일관된 절약과 꾸준한 투자로 ‘모범적인 재테크’를 해왔기 때문이다. 덕분에 그는 연예계 대스타들에게도 귀감이 되었다. 한번은 가수 비가 화장실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가 재테크에 대해 물어본 일도 있었다고.
재테크의 귀재가 되다 보니 그의 이미지는 어느새 구두쇠로 굳어졌다. 하지만 연예가 사람들은 그게 단지 개그맨으로서 그의 ‘컨셉트’임을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서라면 어떤 선물도 아끼지 않고, 면접을 앞둔 후배들에게 기죽지 말라고 명품을 사주기도 한다. 주변에 할 도리를 다 하면서 절약할 수 있는 비결이 대체 무엇일까.
“재테크는 극기에서 시작한다고 생각해요. 쓰고 싶은 것 다 쓰고 남한테 베풀 수는 없거든요. 저는 어릴 때부터 소유하고 싶다는 욕구를 별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 그게 쉬웠어요. 지금도 1년에 양복 한 벌 사지 않아도 불편함을 느끼지 않거든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습성은 형편에 맞지 않는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면서 생긴 것 같아요. 그때 좋은 걸 너무 많이 봐서인지 웬만한 것은 가지고 싶다는 생각도 들지 않더라고요. 형편에 맞춰 동네 레스토랑에 가느니 나중에 호텔에서 멋있게 칼질하고 싶거든요. 그런 마음으로 살다 보면 자연히 소비 욕구가 억제돼서 재테크에 큰 도움이 돼요.”
그가 생각하는 재테크의 두 번째 조건은 미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같은 하루를 살아도 목표가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10년 후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특히 재테크는 하루라도 빨리 시작하는 게 이득이라고 말한다. 1년 만에 2배가 되는 투자는 없어도 10년이 지나면 6배가 되는 투자는 분명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1년에 20%씩 복리로 불어나는 펀드에 투자하면 6년 후 원금의 6배를 찾을 수 있다. 단시간 내에 몇 배를 벌어들이려고 생각하지 말고, 하루라도 빨리 투자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다.
마지막으로 그가 강조하는 건 ‘아는 게 돈’이라는 것. 아는 게 없는 사람은 ‘한방’에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왜곡된 정보에 혹하게 마련이다. 그 역시 재테크를 시작하고 갖가지 투자와 창업으로 많은 돈을 잃었다. 그때 얻은 뼈아픈 교훈이 바로 충분한 정보가 필요하다는 것. 그가 늘 책을 가까이하고 다양한 것을 경험한 사람의 말을 들으려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가 많지 않은 수입으로 재테크에 성공했어도, 사실 연예계에서는 롤 모델이 되기 힘들죠. 많은 사람들이 한 번에 떠서 거액의 출연료를 받아 부자가 되길 원하잖아요. 그런 와중에 대형 개그맨이 아닌 저의 삶을 따라오고 싶어 하는 후배가 있을 때는 제 자신의 일인 양 충고해줘요. 정말 저처럼 되고 싶다면 일단 멋으로 끌고 다니는 외제차부터 팔라고 하죠.”
대부분의 후배들은 유행어 ‘한방’으로 정상에 서서 인기와 부를 거머쥐고 싶어 할 것이기에 자신의 충고가 필요 없다고. 하지만 그곳은 극소수만 오를 수 있는 자리 아닌가. ‘한방’의 신화를 이룬 대형 개그맨 옆에서, 그는 15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성실함으로 버텨 후배들의 또 다른 롤 모델이 되고 있다.
‘곱하기’가 안 나와서 공부를 접다
김생민이 효자인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의 부모는 맞벌이를 하면서 외아들인 그를 위한 투자를 아끼지 않았다. 전셋집에 살던 그가 사립초등학교를 다니고 수험생 시절 과외나 학원을 끊어본 적이 없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렇게 부모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는데 연예인이 되겠다고 하니 저에 대한 실망이 이루 말할 수 없었어요. 제가 평소 말썽 한 번 피우지 않다 보니 크게 싸운 적은 없지만 그 일로 속이 상해 몇 년간 틀어져 계셨던 것 같아요.”
실망한 아버지의 모습에 자극을 받아 김생민은 ‘헝그리 정신’으로 열심히 일했다. 대학에 들어간 이후 말 그대로 ‘안 쓰고 안 입으며’ 5년간 돈을 부은 적금통장을 가지고 갔더니 그제야 아버지의 마음이 풀리더라고. 하나뿐인 아들이 공무원이 되길 바라던 마음이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고3인 그가 바라본 직장인의 미래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사실 죽어라 공부하고 안 되면 재수를 해서라도 아버지가 원하는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해서 정말 성공할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김생민식 표현으로는 ‘곱하기’가 나오지 않은 것이다.
“저희 가족은 정말 화목해요. 아버지가 10남매의 장손이라 명절이면 친척들이 집에 와글와글 모여들어요. 그래서인지 어릴 때부터 어른들의 대화를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죠. 열이면 열, 인생의 화두와 평생의 목적이 돈이었어요. 각자 다른 길을 걷지만 똑같이 돈 때문에 힘들어하고 기뻐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성공해야겠다고 굳게 결심했는데 부모님이 원하는 길에서는 그 성공이 보이지 않았어요.”
김생민이 연예계에 들어온 데에는 이런 생각에 더해 ‘크나큰 오해’가 있었다고. 고등학교 때만 해도 그는 다니는 독서실에서 제일 잘생긴 학생이었다. 깎아놓은 머리가 밤톨처럼 귀엽다는 칭찬을 여러 번 듣고 우쭐해진 그는 CF 스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울예전 연극영화과에 진학하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혹독했다.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자 대부분의 남자들이 자신보다 얼굴이 말쑥하고 키는 180cm를 훌쩍 넘었다. CF 스타가 되겠다고 생각한 터라 연기에 대해서는 특별한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그는 카메라 앞에만 서면 경직되고 울렁증을 느꼈다.
“그래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시대에 남을 유행어를 만들지도, 그 시대 개그에 한 획을 긋지도 못했지만 ‘봉숭아학당’, ‘닥터 갈매기’, ‘한바탕 웃음으로’, ‘코미디 세상만사’ 등 지금까지도 유명한 개그 프로그램에 꾸준히 출연했어요. 물론 지나가는 남자 1 같은 엑스트라를 할 때가 더 많았죠.(웃음)”
그는 일을 가리지 않았다. 재능의 한계를 느껴도 방황하지 않았다. 엑스트라라도 우습게 보지 않고 열심히 했다. 그는 자존심을 챙기기 전에 아프신 부모님을 모셔야 하는 외아들이었다. 1998년 개그 프로그램에서 퇴출되지 않았다면 그는 아직도 개그에만 집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개그맨 김생민, 리포터 김생민
“만약에 그냥 집에 가라고 했으면 마음 접고 딴 일을 했겠죠. 그런데 개그 프로그램에서 쫓겨난 제게 ‘너는 우스꽝스러운 복장보다 넥타이와 양복이 어울린다’고 위로를 해주시며 <시네마 데이트> 공개 오디션을 추천해주시더라고요. 거기에 합격하면서 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거죠.”
<시네마 데이트>에서 그가 출연하는 시간은 단 20초. 이후에는 내레이션으로 영화를 감칠맛 나게 설명해주면 되었다. 카메라 공포증이 있던 그도 20초의 시험 앞에서는 편안해질 수 있었다.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한데 매주 고정적인 수입도 생기니 정말 신이 났다. 마치 직장을 구한 것 같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매일 밤을 새워서 아이디어를 짜내며 버티던 개그계의 풍랑 속에서 빠져나와 안주할 수 있는 섬을 발견한 기분이었다고. 게다가 내레이션을 맡으면서 지적인 이미지가 더해져 리포터로서의 활동 영역이 넓어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대접을 받으면서 리포터를 시작한 건 아니에요. 스물세 살 청년이 대접받는 자리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어요. 일이 들어오는 대로 카메라와 함께 야외로 나가기 시작했죠. 지금은 걸출한 연예인들을 만나지만 처음엔 산부인과 의사부터 시골 어부까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어요. 그게 제 인생에 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서로의 실력을 비교하며 긴장할 수밖에 없는 개그맨 동료들보다 피디, 카메라맨, 작가와 함께 봉고차를 타고 지방을 누비는 게 더 마음 편했어요.”
시대가 그의 편이었나 보다. 처음엔 아침 방송 주말 편에서나 필요하던 리포터가 전 프로그램으로 다양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일본 방송의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도 있지만, 그로서는 계산하지 못한 일이다. 그는 그저 남들이 쳐다보지 않은 일을 조금 먼저 시작했고 열심히 했을 뿐인데 <연예가 중계>의 10년 장수 리포터로 자신만의 캐릭터도 갖게 되었다.
그러다 보면 개그맨 김생민은 잊히고 리포터 김생민만 남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는다. 실은 지금도 그에게 웃긴다는 건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연예가 중계>에서 그가 등장하는 몇 분만이라도 사람들을 웃기고 싶은 것, 그게 개그맨 김생민의 바람이다.
리포터를 처음 시작했을 때는 연예인 뒤꽁무니를 따라다니며 돈을 번다는 원색적인 비난도 들었다는 그에게 당시 자존심이 상하지 않았냐고 물으니 웃으며 말한다.
“저는 아픈 부모를 모시고 사는 외아들이었어요. 뭐든 열심히 할 준비가 되어 있었죠.”
내 밥 차려주는 걸 ‘임무’로 생각하는 귀여운 아내
돈을 아끼는 사람이라고 지레짐작하고 만난 김생민은 무엇보다도 가족을 끔찍이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런 그가 최근 새로운 가정을 꾸렸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다.
아내가 맛있는 걸 많이 해주냐고 묻자 얼굴에 함박웃음이 터진다.
“스물일곱이면 아직 어린 나이잖아요. 요리를 다 떼고 오진 않았지만 열심히 노력해요. 문화센터에 다니며 배워 와서는 매번 새로운 요리를 해줘요. 어제는 오징어불고기와 맛탕을 배웠다고 하면서 해줬는데 참 맛있더라고요.”
결혼을 하고 나서 달라진 게 있다면 아침을 집에서 먹는다는 점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 때문에 출근하는 시간이 매번 일정치가 않은데 그의 아내는 항상 그보다 두 시간 먼저 일어나 꼭 밥을 차려준다고. 어린 아내가 ‘남편 밥을 해주는 게 나의 임무’라고 굳게 다짐하고 있는 것 같아 그저 귀엽다.
“방에는 큰 스케줄표도 붙여놓았어요. 매번 어디 가냐고 물어서 제가 직접 적어두죠. 거짓말할 수도 없어요. 제가 어디 간다고 하면 그 다음날 TV에 그 모습이 꼭 나와야 하니까요.(웃음)”
김생민이 아내 유지희씨를 만난 건 2년 반 전 선배의 집들이에서였다. 예쁜 외모보다도 다른 사람을 자상하게 대하는 태도에 반해 석 달을 쫓아다닌 끝에 정식으로 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 더 깊게 만나보니 아내는 처음에 본 대로 행동에 신중했고 부모님을 잘 챙겼다. 절약하는 모습 또한 마음에 꼭 들었다.
“처음 만났을 때 제 약한 개그에도 환하게 웃어주던 모습이 좋았어요. 만나보니 아내는 뒤에서 묵묵히 도와주는 타입이라 더욱 믿음직스러웠어요. 결혼하기 1년 전부터 우리는 꼭 결혼한다고 세뇌시켰죠. 와인바에서 케이크에 촛불 하나 꽂고 반지를 꽂아 프로포즈를 했어요.”
아내는 바라는 게 많지 않다. 아내가 좋아하는 건 세 가지. 산책, DVD 보기, 마트에서 장보기다. 그 세 가지를 남편과 함께할 때 행복하다고 말한다. 김생민은 어쩜 사람이 저렇게 소박할까 했지만 그도 이제 신혼의 소박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며 웃는다. 어른이 되기 전부터 ‘곱하기’를 해보며 인생을 계산하던 이 딱딱한 남자가 신혼의 행복 덕에 조금은 부드러워진 것 같다.
출처 : 우먼센스
박미혜 기자()/사진=조세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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